로그인 해주세요.

자유 게시판 *자유로운 대화공간입니다. 회원간 예의를 지켜주세요. #정치글 #친목 금지

[영화 pick]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있고, 아이가 되지 못한 어른이 있다, <생일>

멀어지는 동시에 가까워지는, 참여를 요구받으면서도 참여해서는 안 되기도 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무언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면, 아마도 그건 어른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일 테다. 말 그대로 어른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아니, 물어야만 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영화가 다루는 세월호의 기억에는 사회 시스템에 죄를 묻는, 그에 투쟁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분명하게도 이 영화는 세월호 자체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에서, 자동차에 탑승한 전도연의 왼쪽 시선을 보여주는 카메라를 당신이 보았다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자동차에 탑승한 전도연을 일인칭 쇼트로 비추는 카메라 밖에서는 세월호 관련해서 투쟁을 벌이는 이들의 스피커 소리가 들려오고, 언제까지나 외면할 것만 같았던 전도연을 대신해서 카메라는 그쪽을 아주 잠깐 응시한다. 바로 이때 우리가 보는 것은 이 영화가 세월호를 다루고 있다는 자각인 동시에, “우리가 보려고 하는 것은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다”라는 속삭임이다. 즉 이것은 세월호가 아니라 전도연의 영화다. 영화의 이름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아들을 떠나보낸 어미의 슬픈 울음소리이다. 

 

영화는 세월호라는 사건에서 짙게 드리운 죽음을 지워내고 그것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만을 온전히 조명하려고 시도한다. 위에서 언급한 쇼트를 보면 알겠지만, 이러한 태도는 스크린 속으로 하나의 가족을 축소하려는 시도이다. 이 대목에서 위의 쇼트를 재배치하면 다음과 같다. 도로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자동차에는 아들을 잃어버린 어미가 타고 있고, 유리창으로 분리된 바깥세상에서는 시끌벅적한 이야기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이때 이 유리창이 내부와 외부를 갈라놓음에도 여전히 소리는 안쪽으로 스며들고 있다. 다르게 말해,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야는 세월호 사건이 스크린 외부에 미리 전제된 상태에서 그것과 분리된 안쪽 세계로만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주관과 객관으로 혼재된 외부 세계에서 그것 사이의 분리를 요청받게 된다. 마치 전도연처럼 말이다. 

 

영화에서 그녀는 같은 슬픔을 공유하는 유가족과 어울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것은 공유된 세계에서 개인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시도이다. 모두의 수호(윤찬영)에서 나만의 수호로, 즉 그녀는 객관과 주관이라는 두 가지가 혼재된 세계에서 자기가 직접 보았고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자신만의 객관 속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전도연과 관객인 우리 간에 공명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과연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진실이라는 이름의 증거를 뜻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객관적인지 주관적인지를 매 순간 묻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객관적인 것이 곧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건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스스로가 진실을 품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반대로, 객관적인 사실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은 곧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로 변용된다. 하지만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조명하는 이 영화에서 그러한 말은 다음과 같이 사용된다. 내가 알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객관적인 것이었나. 즉 이것은 앎의 척도이자 관심의 수준을 자책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를 점검함과 동시에, 그러한 모습이 영화 속의 전도연에게서 발견됨을 확인하게 된다. 아마 빗대어보자면, 세월호 사건이 벌어진 공간을 사회 외부에서 집안의 방 한구석으로 축소하는 순남(전도연)의 시야는, 외부 세계에서 영화관 스크린으로 시선을 응집하는 우리의 모습에 대응될 수 있을 테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은 밖에서 안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스크린의 종언과 함께 다시금 현실로 돌아오게 되므로 길게 늘인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영화 속 전도연과 영화 밖 우리 간의 결정적인 차이다. 영화 속의 순남이 겪은 상실의 무대는 끝없는 공허만을 그 위에 품게 되지만, 우리의 여정은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영화관 속 조명 어딘가로 흩뿌려지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잠깐 사이의 확대된 시선을 통해 사건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동시에 사건으로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인 덕분이다. 동일시하면서도 동일시하지 않는 영화라는 매체가, 세월호라는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방법은 멀어지는 동시에 가까워지는, 참여를 요구받으면서도 참여해서는 안 되기도 하는 아주 적절한 거리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62dd9773f17864bba102f14e695ce08b.jpg

 

타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보내는 시선 

 

이때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왜 참여해서는 안되냐고 말이다. 이에 나는 다음처럼 답할 예정이다. 영화에서 순남이 죽은 아들의 방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에 답하는 순남의 답변은 아주 명쾌하다. “세상에는 그냥 싫은 것도 있어.” 어쩌면 난니 모레티의 <아들의 방>이 떠오르기도 하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러한 금단의 영역이 손쉽게 깨어지는 모습을 목격한다. 자신의 기억 속 아들의 모습이 온전히 투영되는 해당 공간에서 순남은 상상 속의 아들에게 옷을 입히고, 대화한다. 쉽게 말해 순남은 자신의 내면을 외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남이 외부인의 접근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순남은 아들의 방에 외부인이 침입하기를 원치 않는다. 영화에서도 거의 반쯤 외부인으로 치부되던 순남이 아빠(설경구) 또한 그녀의 마음을 열기 전까지는 방 안에 제대로 접근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영화 밖의 우리가 ‘아들의 방’에 쉬이 접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은 확실히 들 것이고, 우리로서는 어떠한 것으로도 그 속의 참여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타자로만 남아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나는 폴 리쾨르의 말로 답변을 대신하고 싶다. 세상에는 타자이면서도 자신인 존재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타자이면서도 자신인 존재, 이를테면 배우자나 자녀, ‘소울 메이트’라고 불리는 그것에는 자신의 영혼 반쪽을 아낌없이 내어줄 만한 값어치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영화 속 순남에게서 영화 안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수호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스크린 안에서, 스크린으로만 등장하는 수호의 모습에는 그를 타자로 지칭하는 순남 또한 어딘가로부터의 타자라는 사실이 전제되어있다. 말하자면 순남은 자신에게서 수호의 모습을 확인하는 동시에 그것이 텅 빈 스크린으로 남아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있다. 어떤 스크린인가. 서로를 타자로 갈라놓는 금단의 벽이다. 어쩌면 통곡의 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선만큼은 그곳을 통과할 수 있다. 영화의 시간 순서대로 짚어보자면 마트에서 일하는 순남을 찾아온 정일이 순남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고, 순남의 자동차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시선이 있고, 죽은 아들의 사진이 걸린 액자를 바라보거나, 또는 수호의 친한 친구가 아르바이트 매장 안에서 밖으로 보내는 시선 등이 있다. 그리고 영화 밖에서 영화 안으로 투과하는 우리의 시선 또한 있다. 

 

그러므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의미하는 게 다음의 두 가지라는 전제하에, 안에서 밖으로 투과하는 시선은 자신에 대한 반성일 수도 혹은 세상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다. 첫 번째, 우리는 나라는 이름의 타자이다. 두 번째, 어머니는 아들과 일심동체이다. 전자의 항목으로 영화를 바라볼 때 우리는 나라는 이름의 타자, 즉 스스로가 보내는 따가운 시선을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은 기원을 알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느닷없는 깨달음이다. 이때 생각해보면, 우리는 나라는 이름의 타자는 곧 아들의 방에 들어앉은 순남의 모습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나라는 이름의 타자, 순남이라는 이름을 한 어머니는 알 수 없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타자가 된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모두 타자가 된다) 부모와 자식은 본래 한몸이기에 이러한 상황은 이례적인 일이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침대 위에 앉아 하염없이 오열하는 순남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반쪽을 잃어버린,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상실함에서 오는 깊은 슬픔을 통감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내가 이 대목에서 눈여겨본 것은, 외부인의 침입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 그 방에서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어찌하여 접근할 수가 있느냐는 점이었다. 결국에는 타자이지 않던가. 그러니까 어쩌면 그녀의 타자 배척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다음처럼 돌파될 수 있다. 오히려 이 방에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만이 접근할 수가 있다, 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방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수호에게 있어 타자인 자신이 아니라,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즉 스스로가 ‘타자인’ 수호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요컨대 이 방에 진입함으로써 그들은 수호가 된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다시 쓰고 싶다. 이 방, 순남의 마음에 해당하는 공간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이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라면, 스크린이라는 프로시니엄 아치(proscenium arch) 안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 또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아니던가. 어쩌면 바로 이러한 부분이 영화가 세월호라는 사건에 대해 말하는 방법론일 것이다. ‘자신’이라는 게 세월호를 바라보는 현 위치의 우리라면, 그것이 어떠한 곳이든 간에 영화 속 아들의 방은 결국에는 ‘타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보내는 시선’일 것일 테다. 

 

76b2b9bef0f3f650780b77e99d895f8a.jpg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있고, 아이가 되지 못한 어른이 있다

 

어딘지 모르게 두루뭉술해진 것 같지만 결국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 앞에 선 관객들은 늘 타자로 남겨진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상업영화로서는 최초로 세월호 사건을 다룬 이 영화의 목표는 그러한 상업성을 통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내보이는 것인데, 소수의 영화 팬을 제외하면 영화를 분석하면서 관람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쉽게 말해 대부분 관객은 이 영화 속으로 하염없이 빨려 들어가게 된다. 몰입이거나 동화라는 표현이 여기에 쓰일 수 있을 테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동일시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순남이 아들의 방에서 하염없이 오열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감정적인 동일시이지 이성적인 동일시가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순남이 스스로 말했듯, 세상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이 정말로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세월호라는 사건이 왜 벌어져야 했다거나, 혹은 유가족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순남의 태도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영화의 의도는 아마도 그 부분에 있으리라. 그 알 수 없음이 타자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타자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하게 되고, 그렇다고 해서 감정적인 접근 또한 ‘아들의 방’으로의 진입을 저지하는 순남에 가로막히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을 돌파할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곳에서 타자가 되어 영화 속의 우리에게 시선을 보내고 싶다. 결과적으로 타자의 자리에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고백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어떤 고백인가.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미성숙함에 대한 자기성찰이다. 이 영화는 주로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 중에서 부모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지만, 영화 속에서는 수호의 동생이나 수호의 친구들 또한 있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이 영화는 사실 두 갈래의 선택지가 있다. 어른의 길과 아이의 길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분명 두 갈래임에도 우리가 단지 한 갈래만을 눈여겨보게 된 건 영화 속에서 수호가 죽음을 맞이한 타자로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에서는 자연스럽게 아이의 길이 절단되어있다.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끊긴 길에 대해 다시금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할 예정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내가 이 글의 서두에 썼던 이야기로 기수를 돌려보면서 논하도록 하자. 

 

나는 글의 서두에서 어른이란 무엇인지를 물으면서, 그에 대한 이유는 우리가 기억하는 세월호는 어른들의 책임을 (주로) 묻는다는 점에 있다는 점을 말한 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책임이 어른에게 있다는 게 아니라, 묻는다는 행위 자체를 우리가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 문장에서 어른이란 무엇인지를 제대로 탐구하지 않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어른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법률이 정하는 만 19세가 어른의 기준일 수도 있다만, 사회적으로 한 사람 몫을 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테다. 그렇다면 이때, 어른은 대체 언제쯤 되는 걸까.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타인을 지적하기에 앞서서 나 또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 고백하고 싶은 것은 2014년 당시에 고등학교 1학년으로, 영화 속에서는 아이의 자리에 있어야 할 나 자신은 영화 밖에서 ‘어른’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개인적으로 착잡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 평자가 아닌 개인으로서 접근할 때, 나 자신은 어른일까 아이일까? 개인의 시간이 개인의 주관으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나 자신은 어느 시간을 살고 있을까?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있고, 아이가 되지 못한 어른이 있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청소년들에게 영화 밖이란 그런 위치를 점유한다. 그들의 기억이 언제까지나 아이의 이름으로 남아있으려 하지만 시간은 그들이 그곳에 남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아들의 방을 졸업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타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보내는 시선이 있다고 앞서 나는 말했었다. 그것은 어른이 된 내가 돌아보는 아이 때의 기억,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이다. 그 반대도 성립할 수 있다. 이때 나는 이 문장에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적하고 싶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 폴 리쾨르와 레비나스 식의 타자의 자리라면, 보편적으로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 사실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자신의 주관을 발굴해내야만 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발굴해내야만 한다. 우리는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사건 당시에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댓글
8
하늘
1등 하늘
2019.04.22. 22:54

저도 영화리뷰나 한번 써봐야겠어요 주말에!

[하늘]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취소 신고
글쓴이
숲속의참치 하늘 님께
2019.04.22. 22:54

어떤 영화요

[숲속의참치]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취소 신고
하늘
하늘 숲속의참치 님께
2019.04.22. 22:56

그냥 상업영화도 있고..

켄 로치 감독 영화도 작년에 2편 봤었는데 정말 좋은 경험이었지요

[하늘]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취소 신고
글쓴이
숲속의참치 하늘 님께
2019.04.22. 22:58

시네필 ㄷㄷㄷㄷ

[숲속의참치]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취소 신고
하늘
하늘 숲속의참치 님께
2019.04.22. 22:59

네 다음 영화인

글도 잘 못씁니다 ㅋㅋ

[하늘]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취소 신고
글쓴이
숲속의참치 하늘 님께
2019.04.22. 23:00

저도 글못씁니다 ㅠㅠ

[숲속의참치]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취소 신고
하늘
하늘 숲속의참치 님께
2019.04.22. 23:02

전 진짜 못씁니다.. 전형적인 이과인이랄까ㅋㅋ

주말에 올려볼게용 아시는 영화일거에요

[하늘]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취소 신고
글쓴이
숲속의참치 하늘 님께
2019.04.22. 23:07

이름이 뭐죠 

[숲속의참치]님의 댓글을 신고합니다. 취소 신고
취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사이트 이용 수칙 230228 수정 admin 19.11.25 7 60776
핫글 미코 마지막 불꽃(?) [6] BarryWhite 24.05.26 12 317
핫글 유주택자와 무주택자.jpg [5] file 흡혈귀왕 00:16 10 413
핫글 후라이드치킨 원툴인곳의 양념 후기입니다 [15] updatefile 루시우 24.05.26 9 346
9694 테슬라 전기차 폭팔 [4] file 범죄자호날두 19.04.23 0 107
9693 썬더라이트닝히트 중입니다. [10] file Havokrush 19.04.23 0 76
9692 정말로..죽은거야...? [12] file 숲속의참치 19.04.22 0 155
9691 재용이형.... 속이 메스꺼워요.... [3] file 범죄자호날두 19.04.22 0 120
9690 으으 시험공부하기 너무 싫네요 [8] file Score_고동빈 19.04.22 0 84
9689 얼굴바꾸기 [3] file 범죄자호날두 19.04.22 0 109
9688 아이폰에 버즈쓰면 [4] Creart 19.04.22 0 72
9687 스티커 하나 올렸습니다 [21] file 숲속의참치 19.04.22 0 94
9686 대한민국 최고 [2] file Score_고동빈 19.04.22 0 100
9685 내일 삼성 서비스 센타가서 [4] Creart 19.04.22 0 60
[영화 pick]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있고, 아이가 되지 못한 어른이 있다, <생일> [8] file 숲속의참치 19.04.22 3 116
9683 아이퐁 11은 얼마나 비쌀까요? [3] Creart 19.04.22 0 55
9682 아이퐁 XI나 기다려볼까요 [6] 비온날흙비린내 19.04.22 0 67
9681 기기 불량만 잡아서 나오면 연기 대환영입니다... [6] 숲속의참치 19.04.22 0 57
9680 꿀잼 시나리오 [3] Helix 19.04.22 0 34
9679 이번주에 쓸 리뷰 [2] Memeko 19.04.22 0 48
9678 폴드 연기가 되던 말던 상관없습니다 [13] 숲속의참치 19.04.22 0 83
9677 [3] 정치닉네임23949591 19.04.22 0 61
9676 4일차) 유지 [1] file 미실 19.04.22 0 83
9675 연기 엌ㅋㅋㅋㅋㅋㅋ [4] file Helix 19.04.22 0 227
9674 갤럭시폴드.gif [4] file 범죄자호날두 19.04.22 1 189
9673 저는 왜 초록 머리가 좋은지 모르겠네요 [9] 숲속의참치 19.04.22 0 89
9672 [단독] SRT 율현터널 선로 뒤틀려···속도 절반 줄여서 간다 [4] HDMI 19.04.22 0 98
9671 삼성 물건인데 아시는분 계신가요? [6] file HDMI 19.04.22 0 111
9670 아퐁6s 실버 64g 팔면 구매하실 분이 있기는 할까요? [4] 우리 19.04.22 0 57

추천 IT 소식 [1/]

스킨 기본정보

colorize02 board
2017-03-02
colorize02 게시판

사용자 정의

1. 게시판 기본 설정

게시판 타이틀 하단에 출력 됩니다.

일반 게시판, 리스트 게시판, 갤러리 게시판에만 해당

2. 글 목록

기본 게시판, 일반 게시판, 썸네일 게시판만 해당

썸네일 게시판만 해당

썸네일 게시판만 해당

썸네일 게시판만 해당

썸네일 게시판만 해당

3. 갤러리 설정

4. 글 읽기 화면

기본 10명 (11명 일 경우, XXXXX 외 1명으로 표시)

5. 댓글 설정

일정 수 이상의 추천을 받은 댓글에 표시를 합니다.

6. 글 쓰기 화면 설정

글 쓰기 폼에 미리 입력해 놓을 문구를 설정합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