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기차 놓친 썰.txt
- 숲속의참치
- 조회 수 392
- 2019.05.04. 16:00
“열차를 놓쳐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우울하오... 정말로 우울하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것은 이상의 <날개>라는 소설의 도입부입니다. 그냥 제가 좋아하는 문구라서 인용해보았습니다. 원문처럼 박제가 되었다는 표현도 어울릴 듯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말 그대로 전주로 가는 열차를 놓쳐서 플랫폼 위에 박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까맣게 굳은 물질처럼 말입니다. (물론 제가 천재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건의 발단을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저의 비루한 체력문제로 5월 3일에서 4일이라는 금토에 걸친 짧은 일정을 짰고, 그 준비를 약 3주 전부터 시작했습니다. 숙소를 예매하고, 영화예매가 풀리기를 기다리고, 뭐 그런 것이었죠. 말하자면 준비는 철저했고, 계획에는 이상이 없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당일 아침 저에게는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 다가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컵반으로 밥을 때우고 오전 6시 15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를 탑승하려던 저의 모습이 보이시나요? 당연히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 이유인즉슨, 분명 가장 처음에 출발하는 열차를 예매했던 제가 6시 05분에 도착한 ‘다른’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떠났다는 점에 있습니다.
<수원역에서 열린 열차의 문입니다. 이거 찍다가 문이 닫혀서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때는 6시 05분, 이미 20분 전에 플랫폼에 나와 새벽처럼 밝아올 (윤동주를 인용한 겁니다) 열차를 기다리던 저는, 갑작스레 도착한 이 열차가 왜 10분이나 일찍 도착했는지 의아해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방문기에 사용할 사진을 촬영하기에 여념이 없었죠. 그렇게 멍을 때리는 사이에 열차의 문이 닫혔고, 저는 당황한 나머지 열차의 문을 두드리며 <부산행>을 찍었습니다. 그러자 다행히도 마음씨 좋은 기관사님께서는 오로지 저를 위한 문을 열어주셨죠. 이때 저는 마음속으로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열차에 타서 소니의 노이즈캔슬링 헤드폰 1000XM3로 멍하니 음악을 듣다 보니, 외부의 소음은 ‘캔슬’되면서도 마음속의 번뇌는 슬며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길치인 제가 이리 쉽게 제 길을 찾아올 수가 없으리라는 의심이었죠. 그렇게 스마트폰으로 코레일 열차앱에서 예매했던 표를 확인했습니다만,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한겁니다. 이 열차는 익산이 종착역인데 전주를 가려면 전주엑스포행 열차를 타야했던 것이죠.
흠...하는 이모티콘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웃거리던 저에게 열차표를 검표하려 승무원분이 다가오셨습니다. 일단 저는, 제가 예매한 표를 당당하게 보여드렸습니다. 그러자 승무원분께서는 2초의 정적과 함께 저를 향한 나즈막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습니다.
“이건 이 열차 표가 아닌데요?”
이에 저는 ‘상상도 못 한 정체!’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화답하셨습니다.
“어... 이거 지금 탄 열차가, 사실 10분 정도 연착된 거거든요. 이따가 천안역에 내리셔서, 반대편 승강장 쪽으로 가신 후에 바로 다음 열차로 갈아타시면 될 것 같아요.”
아마 현명한 독자 여러분은 이미 눈치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매했던 가장 첫차보다 앞서 다가오는 열차가 있었던 것이고, 그 열차와 우리 열차의 배차간격이 얼마 되지 않았었으며, 그런데 그 열차가 10분이 연착되어 오전 6시 05분에 도착한 것을 본래 6시 15분에 도착해야 할 제 열차가 ‘미리’ 도착한 것으로 착각했던 겁니다.
<무궁화씨? 풍경이 이상해요… 우욱… 잘못 타고 싶지 않아요…>
따라서 이것은 구차한 변명이자, 합리적인 변론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는 용산과 구로 사이에서 상행선과 하행선을 2시간 동안 3번이나 잘못 탄 심각한 길치이긴 합니다. 하지만 제가 길치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열차를 잘못 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다음 상황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이미 알고 계시지 않나요? 어안이 벙벙하여 천안역에서 내린 저는, 승무원분이 반대편 승강장으로 가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저 내린 곳에서 대기할 뿐이었습니다. 뭐 여기까지는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10분 늦게 도착한 무궁화호 1501호는 제가 본래 타야 할 1502호와 단 8분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승차간격동안 열차를 어디서 갈아타야할지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영락없이 플랫폼에 박제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저는, 5분 동안 스마트폰을 보며 서 있다가, 제가 타야 할 1502호차가 저 멀리 반대편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아!하고 경각심이 들어 서둘러 계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미필이지만 유격훈련이 무엇인지를 알 정도로 빠르게 뛰어갔는데요, 있어야 할 열차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이 순간 사이드로 맨 백팩의 끈이 끊어져서 손잡이만 덜렁 남게 되어버렸습니다. 무게가 7키로 정도 되었으니 망정이지 그보다 무거웠다면 벌러덩 드러누웠을 겁니다. 일박이일 일정에 뭐가 그리 무거우냐고 물으신다면, 핫식스 355ml 6캔과 각종 과자를 들고왔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천안 : ㅎㅇ>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7시 55분에 출발하는 그 열차가 떠나갔음을 알리는 신호 소리를 제가 그 위의 플랫폼에서 들은 시각은 7시 57분이었습니다. 요컨대, 단 2분의 시간이 2시간으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던 셈입니다. 용량으로 보면 60배가 늘어난 셈이니 가성비로는 정말로 좋습니다만, 문제는 그것이 7시 57분에 열차를 놓친 저에게 다음 열차가 9시 03분 열차였다는 점에 있습니다.
잠시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봅시다. 막 계단 위에 올라와 건너 플랫폼으로 넘어가야 함을 깨달은 저의 귀에 들려온 것은 무궁화호의 경적음, 아아 님은 갔습니다. 따라서 저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오전 근무 역무원분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열차를... 놓쳤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선 눈 깜짝하나 하지 않고 말씀하셨죠.
“저기 바깥으로 나가서 왼쪽에 있는 창구로 가신 후에 표 환불받고 새 표 끊으세요.”
엉덩이에 불이 난 저는 창구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창구에는 아직 8시쯤이라 잠이 덜 깬 모양인지 영혼 없는 눈을 한 직원분이 앉아있으셨습니다. 정신이 없어서 환불받은 후에 아무 표나 샀습니다. 법인 카드라서 무료였던 승차표를 15,100원 중 5,300원이라는 환불 수수료를 물면서 환불했고, 무궁화호보다 비싼 ITX-새마을호를 17,200원을 주고 재예매했습니다.
자 다시 시간을 위에 문단으로 돌려봅시다. 이 열차가 바로 9시 03분에 출발하는 열차입니다. 이 뒤의 이야기는 다행히도 해피엔딩이라 재미가 없습니다. 플랫폼에서 2시간 동안 기다렸고, 그동안 5번의 열차를 떠나보냈으며, 이번에는 헛갈리지 않고 제대로 된 열차를 타서 무사히 전주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생각을 해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만약 제가 1501호 열차를 그대로 놓쳤다면, 그러니까 그 기관사분이 저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지 않으셨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다 짜놓은 일정을 2시간 지연하게 되어 오전 10시 30분 영화를 취소하면서까지 열차 환불 수수료를 지불한 지금의 저는 없지 않았을까요? 물론 다 부질없는 망상이긴 합니다만...
이것이 살면서 비행기도 못 타본 제가 마주한 첫 여행이자, 첫 영화제 방문이며, 전주와의 첫 만남입니다.
<전주 : ㅎㅇ>
무궁화는 제 시간에 운행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꼭 타기전에 열차 번호를 확인하셔야 합니다..!